승리와 희생의 도시, 여가와 휴식이 있는 도시. 호국의 고장  칠곡. 문화유산


현재 위치

> 문화유산 > 인물

인물

트위터에 담기 페이스북에 담기
장석용(張錫龍) 1823년(순조23)~1908년(융희2)
초명은 석규, 자는 진백, 호는 유헌, 여헌의 후손, 학추의 아들로서 덕에게 입양하였다. 1846년(헌종 12)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이 되고 이어 정언(正言), 해남현감(海南縣監), 장령(掌令), 수찬(修撰), 부교리(副校理), 현풍현감(玄風縣監), 집의(執義), 응교(應敎), 군자감정(軍資監正), 병조좌랑(兵曹佐郞),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철종 13년 통정에 올라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재수되었다.

그 후 공조 및 형조의 참의, 도정, 대사간, 대사성, 이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당시 울산에 민요가 발생하니, 조정에서 공의 성망을 빌어서 진압하기로 합의하여 임금께 주달한 바 부사에 임용해서 진무케하니 드디어 무사하였고, 익년에 년사가 대흉하여 구휼을 극진히 하였더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1878년(고종 15) 가선(嘉善)에 승서되어 특진관을 배하고 이어 병형조참판, 한성좌우윤, 동돈령, 대사헌, 부총관, 이조참판등을 거쳐, 고종 27년 형조판서가 되고, 뒤에 공조판서를 거쳐, 1902년(광무 6) 숭정대부에 올라 규장각제한에 이르렀다.

1896년(고종 33) 영남선비들이 크게 의병을 일으키니 왕이 염려하여 특히 공을 명해서 효유하게 하였으니, 이는 대개 공의 평소의 덕망이 영남 유림에 추중 된 까닭이었다.

공은 높은 관직에 있었으나 효성 또한 지극하여 모친이 중환으로 장기병환 중에 음식과 약이(藥餌)를 드리는 일을 반드시 손수하여 남의 손을 빌리지 아니하였다. 부친의 만년에는 공도 또한 백발노경이었으나 조석으로 문안드리는 것을 아무리 풍우 중이라도 굴하지 않았다. 시호는 문헌이고, 북삼읍 오평리에 신도비가 있다.
문헌(文獻)
고종실록(高宗實錄), 교남지(嶠南誌), 유헌집(遊軒集)



본문 콘텐츠 담당자, 최종수정일

담당자
새마을문화과이형기054)979-6432
최종수정일 :
2015-08-02

본문 유틸리티

  • 인쇄
  • 위로
고객만족도조사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인증후선택 통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