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와 희생의 도시, 여가와 휴식이 있는 도시. 호국의 고장  칠곡. 관광명소


신나무골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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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대교구가 움이 튼 신나무골성지

1805년에 프랑스인 김보록 신부가 처음으로 성당을 건립하였다. 1815년 을해박해를 전후하여 형성된 천주교 교우촌으로 한티 마을과 밤에 왕래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주소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산 57번지
문의전화
054-972-2014
관리처
미래전략과
홈페이지
 
천주교 대구 대교구가 처음 움이 튼 요람지가 신나무골이다. 약 100년 전인 1886년, 경상북도 전역의 전교 중심지로 대구본당이 설정되었으나, 그보다 20년 전의 한국천주교 100년 박해의 최종단계였던 병인년(1886년) 대박해의 여파로, 외국인 신부가 아무리 변장을 하더라도 대구 읍내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대구 본당으로 차정된 초대 본당신부는 정처없는 부임이었고, 그래서 3년간이나 대구에서 60리 거리에 있는 신나무골에 은신하여 선교활동(대구 읍내와 부근의 신자들은 이곳으로 비밀리에 내왕하면서 성사를 보았다)을 하다가 그 후 대구 새방골로 진출하였던 것이다.
1860년경 신나무골에 가까운 웃갓(현 상지동)에 살면서 영세 입교한 광주이씨의 문중, 이이전 형제가 이곳에 이사와 살았는데, 이씨 가문은 4형제의 아들을 두었고, 맏아들 이주연은 자수성가하여 살림이 넉넉하였으며, 온 집안이 신앙심이 두터웠다. 아들 4형제중 셋째가 출생하기 전 1886년 겨울에, 대구 본당 신부로 부임하던 프랑스인 '로베르트 김 바오로'(Achille Paul Robert:1853~1922) 신부가, 이곳 이씨 집안에 1888년까지 3년간 체류하면서, 대구 읍내 신자들이 모이는 한티, 새방골(현 대구 서구 상리) 등지 공소를 순회하며 전교하다가, 한불 조약이 비준되던 1886년 새방골로 옮기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전라도 전주본당으로 차정된 보드네, 사베리오 윤신부와, 경남 동래로 차정된 조슈 조 신부가 이곳에서 1년간씩 체류하였다가 떠났다. 당시 불랑 백주교는 장차 각지 교회 설립을 위한 준비공작으로, 전교회장 제도를 마련하여 9명의 후보자를 교육시켜 각지로 파견할 때, 충청도 충주 출신 박상언 회장이 1890년경에 이곳 중화리에 와서, 10년간 전교하다가 떠난 사실이 있었다. 이리하여 이곳 신나무골은 대구를 위시하여 여러 본당 발전의 요람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 된 것이다.
대구본당 초대 주임인 로베르트 김바오로 신부가 이곳을 떠나 새방골로, 그리고 다시 읍내 대야볼(현 대구 서구 수창동) 정승지 바오로의 집으로 옮아가면서, 읍내로 들어갈 준비를 하던 1895년에 칠곡 가실본당이 설립되어, 가밀로 한 신부가 3년간 전교할 때부터 이곳은 가실 본당의 소속 공소로 있게 되었다가, 1928년에 왜관 본당이 설립되면서는 왜관 본당 공소로, 그리고 1967년 신동 본당이 신설되면서 신동 본당의 소속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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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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